그 자유로움
딴세상 같은 정치와 종교, 불협화음은 왜…
청늘
2010. 12. 26. 15:27
종교는 안식과 기원, 구도의 영적 공간이다. 신과 인간이 만나고,
완성된 신앙 대상 숭배자를 우러러 구도 수행하는 신성한 자리다.
대체로 인간은 자기 종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대체로 인간은 자기 종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개인을 떠난 국가 지도자는 국가경영에 자기 종교를 넘어서야 한다.
요즘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교계의 감정이 좋지 않다.
요즘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교계의 감정이 좋지 않다.
얼마 전 한나라당이 단독처리한 내년도 예산안에서 템플스테이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이 불심을 흔들어놓았다.
불교계는 대통령 이명박이 기독교 장로인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2004년 서울시장 시절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었고,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을 여의도 침례교회 목사는 “하나님이 시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이명박 정부 출범부터 청와대와 행정부 인사에 개신교 신자가 너무 많은 것이 지적되고, 국토해양부의 대중교통정보 이용시스템에서 주요 사찰 명칭이 삭제되는가 하면, 일부 극단적인 개신교도들은 민족문화유산 훼손 및 불교 비방 행위로 불심을 간단없이 자극했다.
이와같은 일들을 뭉뚱그려 불교계는 대통령 이명박의 불교에 대한 차별 내지는 홀대라고 보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승만 정부 이후 역대 정권과 종교는 편향 정책과 정치개입에 의한 인한 갈등으로 멀고도 그러나 멀지도 않은 미묘한 역학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경우는 차별에 따른 불교계의 피해의식과 반감이 그 어느 때보다 상당히 악화된 상태에 도달해 있다.
정치와 종교. 딴세상 같지만, 아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단정적 관념을 넘어 국가 공동체로서의 종교 인구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따라서 자칫 종교 정책이 오해를 받을 경우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게 마련인지라 국가 지도자로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불교계에서, 아니 대한민국 종교계를 통틀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기도하는 유일한 대통령도 있긴 하다. 30년, 강산이 세번 바뀌는 세월을 건너간 대통령 박정희다.
서울 도선사, 김천 직지사, 강화도 선원사, 영동 천국사, 논산 관측사 등 곳곳에 대통령 박정희 또는 내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대통령 박정희 내외의 영정을 모신 사찰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 그럴까. 불교 편향으로 밀착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정치 현안에 저항하던 현실 참여적인 일부 기독교 세력이 가만있을 리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럴까. 그가 불교 신자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 박정희의 생애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종교라면 기독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경북 선산군 구미읍 상모리 산골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기와집 서너채를 연결해서 만든 마을 예배당에 다닌 적이 있다. 상모교회가 그곳이다. 소년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상모교회의 유년 주일학교에 다녔고, 조금 크면서부터는 웅변과 동화 구연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마을 예배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던 인연은 그가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 끝이 나고. 이후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상모교회 100년사〉)
그는 5.16혁명 후 최고회의 의장 시절,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국기독교교육자대회에 참석해서 “나도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녔는데 요사이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다. 여러분들이 교육을 잘해주어 나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일학교를 잘하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연평도를 때리면 울릉도도 때리라고?
이후 그가 신앙한 종교는 없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갖지 않았으며, 국정 운영에 특정 종교를 드러내놓고 중시한 일도 없다.
다만 그는 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로서 자기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2년 6월초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에서 모내기를 할 때의 일이다.
박 의장 일행의 모내기 행사와 때를 맞춘 듯 단비가 내린 것이 화제에 오르자, 수행기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의장님께서도 이번 기회에 종교를 하나 선택하시지요.”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요.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시는 겁니다.”
특정 종교의 신은 아니지만 그가 생각하는 신의 존재는 있다는 것이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 이를테면 그가 믿는 하느님은 공짜가 없는 하느님이고, 무조건 은혜를 퍼주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신에게 적접 호소하는 일기를 쓴 적도 있다.
1974년 8월 부인 육영수를 잃고 얼마 안되어 비무장지대에서 북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돼 온나라가 발칵 뒤집혔었는데 이듬해 봄 제2땅굴이 또 드러나자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이런 대목을 남겼다.
“오 신이여! 북녘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해주소서.”
침략과 살생에 대하여 아무리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라도 인명을 해치는 죄악에 관대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그는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즉석 연설을 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땐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적이 연평도를 때리면 울릉도도 때리라고 내주면서 적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이를테면 불의에게까지도 무조건 사랑을 퍼주지 않는, 불의를 징벌하는 하느님, 호국의 하느님인 것이다.
불교계는 대통령 이명박이 기독교 장로인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2004년 서울시장 시절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었고,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을 여의도 침례교회 목사는 “하나님이 시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이명박 정부 출범부터 청와대와 행정부 인사에 개신교 신자가 너무 많은 것이 지적되고, 국토해양부의 대중교통정보 이용시스템에서 주요 사찰 명칭이 삭제되는가 하면, 일부 극단적인 개신교도들은 민족문화유산 훼손 및 불교 비방 행위로 불심을 간단없이 자극했다.
이와같은 일들을 뭉뚱그려 불교계는 대통령 이명박의 불교에 대한 차별 내지는 홀대라고 보고 있다.

대통령과 영부인의 기도.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봉헌 합니다.
돌이켜보면 이승만 정부 이후 역대 정권과 종교는 편향 정책과 정치개입에 의한 인한 갈등으로 멀고도 그러나 멀지도 않은 미묘한 역학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경우는 차별에 따른 불교계의 피해의식과 반감이 그 어느 때보다 상당히 악화된 상태에 도달해 있다.
정치와 종교. 딴세상 같지만, 아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단정적 관념을 넘어 국가 공동체로서의 종교 인구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따라서 자칫 종교 정책이 오해를 받을 경우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게 마련인지라 국가 지도자로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불교계에서, 아니 대한민국 종교계를 통틀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기도하는 유일한 대통령도 있긴 하다. 30년, 강산이 세번 바뀌는 세월을 건너간 대통령 박정희다.
서울 도선사, 김천 직지사, 강화도 선원사, 영동 천국사, 논산 관측사 등 곳곳에 대통령 박정희 또는 내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대통령 박정희 내외의 영정을 모신 사찰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 그럴까. 불교 편향으로 밀착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정치 현안에 저항하던 현실 참여적인 일부 기독교 세력이 가만있을 리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럴까. 그가 불교 신자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 박정희의 생애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종교라면 기독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경북 선산군 구미읍 상모리 산골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기와집 서너채를 연결해서 만든 마을 예배당에 다닌 적이 있다. 상모교회가 그곳이다. 소년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상모교회의 유년 주일학교에 다녔고, 조금 크면서부터는 웅변과 동화 구연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마을 예배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던 인연은 그가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 끝이 나고. 이후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상모교회 100년사〉)
그는 5.16혁명 후 최고회의 의장 시절,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국기독교교육자대회에 참석해서 “나도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녔는데 요사이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다. 여러분들이 교육을 잘해주어 나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일학교를 잘하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연평도를 때리면 울릉도도 때리라고?
이후 그가 신앙한 종교는 없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갖지 않았으며, 국정 운영에 특정 종교를 드러내놓고 중시한 일도 없다.
다만 그는 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로서 자기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2년 6월초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에서 모내기를 할 때의 일이다.
박 의장 일행의 모내기 행사와 때를 맞춘 듯 단비가 내린 것이 화제에 오르자, 수행기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의장님께서도 이번 기회에 종교를 하나 선택하시지요.”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요.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시는 겁니다.”
특정 종교의 신은 아니지만 그가 생각하는 신의 존재는 있다는 것이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 이를테면 그가 믿는 하느님은 공짜가 없는 하느님이고, 무조건 은혜를 퍼주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신에게 적접 호소하는 일기를 쓴 적도 있다.
1974년 8월 부인 육영수를 잃고 얼마 안되어 비무장지대에서 북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돼 온나라가 발칵 뒤집혔었는데 이듬해 봄 제2땅굴이 또 드러나자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이런 대목을 남겼다.
“오 신이여! 북녘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해주소서.”
침략과 살생에 대하여 아무리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라도 인명을 해치는 죄악에 관대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그는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즉석 연설을 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땐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적이 연평도를 때리면 울릉도도 때리라고 내주면서 적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이를테면 불의에게까지도 무조건 사랑을 퍼주지 않는, 불의를 징벌하는 하느님, 호국의 하느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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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참석한 박 대통령. 1963년 12월 15일 육군교회에서 열린 제5대 대통령 취임축하 예배 참석한 모습. 맨좌측이 ‘독립운동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 그 옆이 전택부 서울YMCA 총무, 맨우측은 김성은 국방장관이다. ⓒ 정부기록사진집 |
"홍제암 보수하라. 소나무 살려내라” 엄명
인간 박정희의 내면에 영향을 준 종교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5.16혁명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은 그를 “원래 불교의 영향을 받아 언행에는 주로 선적(禪的) 가치관이 내재해 있었다”고 보았고(장도영 회고록 〈망향〉), 세간에서는 그의 종교적 성향에 대하여 ‘친불교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신에서 그를 불교도라고 오보를 낼 정도였으니 ‘친불교’라는 말이 무리는 아닐 터이다.
그의 해인사 방문 이야기가 있다.
1977년 12월 구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했던 길에 해인사를 찾았다. 해인사 시찰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방장(方丈) 성철과의 만남도 기대되는 관심사였다.
해인사 주지가 백련암으로 뛰어가 대통령의 방문 소식을 전했다.
“큰스님이 절에 내려오시어 영접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성철은 돌아앉았다.
“나는 산에 사는 중인데, 대통령 만날 일이 없다.”
성철이 미동도 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주지가 대통령을 영접했다.
해인사 주지는 전혀 화난 기색이 없이 경내를 돌아보는 대통령을 조심스레 안내했다.
오히려 대통령은 사명대사가 열반한 암자인 홍제암이 쇠락해진 모습을 보고는 수행 관계관에게 보수토록 지시하고는, 다시 계곡의 소나무들이 거의 고사(枯死) 상태에 이른 것을 보더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라”고 엄명했다.
그렇게 홍제암은 새단장이 됐고, 소나무들은 3년간의 방제 노력 끝에 푸르름을 되찾았다.
불가에서는 대통령이 해인사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 사찰에서 대통령 내외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는 그만큼 인연이 각별하기 때문이라고도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 역사 유적과 문화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사찰 터의 발굴 조사와 복원사업이 활발했던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천년의 세월을 품은 사찰은 그 자체가 문화재다. 국보급 문화재를 갖고 있고,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찰을 새로 꾸미고 길을 내주고 하는 것은 이순신의 현충사, 권율의 충장사를 단장하는 것과 똑같은 국가적 사업인 것이다.
무엇보다 불교계는 박정희 정부에서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지정된 1975년의 경사를 잊을 수 없을 것 이다. 그해 1월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별도의 여론수렴 과정없이 석탄일의 공휴일 지정 안건을 갑작스레 상정, 어린이날과 함께 법정 공휴일로 선포했다.
이 경우도 성탄절과의 형평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친불교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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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과 고승 청담. 1970년 청담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면서 “훈장을 큰스님 가사에다 달아도 괜찮겠습니까?”하니, 청담은 “이게 다 꿈속의 일. 달거나, 아니 달거나 무슨 상관 있겠소이까?”라고 했다. ⓒ 도선사 홈피 |
대통령 박정희는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할 때 이미 존칭으로 쓰이고 있는 “스님”은 물론, “목사님” “신부님” 등 ‘님’자를 붙였다.
모든 종교의 독특한 공간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국가 지도자의 화합의 지도력이 방방곡곡 민심 앞으로 겸허히 다가갈 때 그 지도자의 덕망은 빛나게 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고향마을의 상모교회가 6.25때 상당히 파괴된 채 그대로 있는 것을 알고, 1967년 교회 건축비 380만원 중 100만원을 헌금하고, 공병대 운전병 1명과 트럭 1대를 1개월간 파견해 교회 신축을 지원하기도 했다. (매일신문 2006-09-15)
그리고 이듬해 1968년에는 동학의 후신이며 3.1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종교 천도교의 수운회관(서울 종로구 경운동) 건립에 정부 재정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천도교인들은 당시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수운회관 건립 헌금을 보내와 힘을 실어준 일을 잊지 않고 있다.
대통령 박정희의 신앙
종교에 대한 국가 지도자의 생각은 모든 종교인들의 큰 관심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박정희는 가족의 종교를 각자의 자유 선택에 맡겼다. 부인 육영수는 독실한 불자로 북한산 도선사를 찾아 불공을 드렸고, 그곳에 주석하고 있던 고승 청담에게서 대덕화(大德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 학교를 다닌 장녀 근혜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때 근혜는 “세례를 받아도 되느냐고 어머니께 물었고 어머니께서 허락해 주셨다”고 했다. (〈신동아〉2002년 2월호)
우리가 알 만한 외국인 중에 미국 대통령 카터는 자기 종교에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그가 한국 대통령 박정희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화제가 되었었다.
1979년 여름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중에서 카터는 김포공항까지 동승한 박정희에게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고 “없다”고 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 LA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외교에 있어서의 정교분리 원칙을 깨뜨린 것이며 미국이 한국의 종교적 신앙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 “카터는 자신의 종교를 과시하는 사람”이라는 등 카터의 분별없는 언행을 비판했다.
이러한 카터와 달리, 호국(護國)의 진정성이 넘치는 기도로 대통령 박정희를 감복케 한 목사가 있다.
1971년, 대통령이 참석한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장에서 육사 군종실장인 김선도 목사(소령)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축도를 했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우리 사관생도들이 이제 할퀴고 찢긴 이 조국을 지키러 나갑니다. 이들을 보호해 주시고 국군통수권자이신 대통령이 외롭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솔로몬의 지혜와 다윗의 용기를 대통령께 부어주십시오.”
이때 대통령 박정희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고, 졸업식이 끝난 뒤 김 목사의 손을 잡고는 “좋은 기도를 해주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고독했다.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한국의 인권에 대한 간섭으로 박정희 정부를 어지간히도 괴롭혔거니와, 국내의 정치적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아 자주국방, 자립경제를 향한 대통령의 뚝심은 때로 고독한 정열, 고독한 몸부림으로 비쳐졌다.
당시 한 원로 목사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젊은 후배 목사들에게 “네가 진실로 목사가 되려거든 박 대통령의 10분의 1만이라도 되어보라”고 충고했다. 옛날 상모리에서 소년 박정희와 함께 상모교회와 보통학교를 다녔던 친구 김삼수였다.
그는 목사가 되어 대통령이 된 박정희와 해마다 한두차례씩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았고, 1979년 10월 27일 또 한차례의 편지를 부치려다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고 목놓아 울었다. (조선일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의 눈물은 한국의 눈물이요, 대통령 박정희의 눈물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미국의 원조 농산물이 며칠만 늦게 도착해도 수백만이 대책없이 굶주려야 했던 나라, 외국에 나가 사는 동포들이 국적을 묻는 말에 “한국”이라는 말을 못하고, 국적을 말해줘도 한국이 지구상에 어디 붙어 있는지를 모르는, 그런 나라를 혼신으로 부둥켜안고 격동의 세월과 함께 온갖 설움, 정한(情恨), 영욕(榮辱)이 녹아 흐르는 박정희의 눈물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도 그 자신을 위해 한번도 쓰지 않았으며 국익(國益) 앞에는 자신의 권위도 다 벗어던진 지도자, 애오라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며, 그야말로 죽도록 일만 하다가 돌아간 지도자 박정희였던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종교를 갖지 않았지만, 국가와 국민에 관한 한 옹골찬 신앙을 지닌 지도자였다. 교회에 기도하지 않고 절에 불공 드리지 않아도 그가 가진 신앙은 구국과 호국의 땀과 눈물이 점철된 바로 ‘조국’이었으며, 그가 믿는 하느님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바로 그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글/김인만 작가